ABOUT YONABARU
요나바루의 역사
요나바루면의 역사는 오래됬으며, 오키나와 최고의 고요집 [오모로사우시] 중에서 [요나하루]나 [요나하바마] (요나바루해변)의 이름으로 등장하며 시작된다.
류큐신도에서는 노로라고 하는 여제사 직책이 있고, 그 최고 지위를 키코에오오기미라고 부른다. 키코에오오기미는 국왕을 영적으로 보호하는 직책을 맡고 있고, 떨어지는 재앙을 영적인 힘을 가지고 퇴치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 키코에오오기미 유카리의 땅으로서 요나바루면에는 많은 수의 유적지가 남겨져 있다.
요나바루의 지명은, 해안지였던 곳의 명칭이다라고 알려져 있고 선사시대의 면모는, 조용하고 하얀 모래해변이 이어지는 후미의 한 갯가의 선계였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고대 요나바루 사람이 최초에 살기 시작한 곳은, 상요나바루였다고 알려지고 있다. 당시의 상요나바루는 바다 가까이에 있어 어로 관리에 편리하고 물이 풍부하여 자연 속에 사람이 살기 시작하며 부락이 생겼다고 여겨진다.
명치 12년에 폐번치현이 실행되었는데, 요나바루는 오오자토 행정구역으로 편성되어, 명치 41년 시면촌제에 의해 오오자토촌의 한 구역이 된다. 대정 3년에는 나하-요나바루간의 오키나와현에서 처음으로 경전철도가 개통되어, 요나바루는 시마지리군 동남부나 나카가미 지방을 연결하는 산업 경제의 대동맥이 되어, 점차적으로 활황을 띄게 된다.
분면문제는 쇼와3년경부터 거론되기 시작하여, 쇼와 19년 면제실현을 목전에 두고 전쟁으로 중단되었지만, 전후 다시 분면의 기운이 높아져 쇼와 24년 3월 31일에 분리하여, 동년 4월 1일 20년만에 요나바루면이 탄생하였다.패전후부터 쇼와 47년 5월 15일의 조국복귀까지의 27년간 오키나와의 시정권은 미국 정부의 지배 아래 놓여졌지만, 요나바루인 스스로의 힘으로 점차 부흥의 길을 걷기 시작하여, 오늘날의 요나바루면을 만들어왔다.
오키나와에서는 1914년(대정3년)12월, 오키나와, 요나바루간이 개통했지만, 통상의 기차보다 작은 철도 [오키나와 운영 철도, 경전철도]이라고 하는 기차가 달리게 됐다. 선로는 나하역~요나바루역까지의 요나바루선, 나하역~카데나역까지의 카데나선, 나하역~이토망역까지의 이토망선, 이렇게 3개 노선이 운행되었다. 이 경전철도의 도입에 의해 대량의 사람과 물자의 운송이 가능해지고, 면의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하지만 오키나와전에서 미군의 공격으로 파괴되어, 카데나선은 1945년 3월23일경, 요나바루,이토망선은 3월28일경이 최후의 운행이 되고 모습을 감추었다고 말한다. 현재에도 옛 모습 그대로 구 요나바루역사는 보관되고 있다.